가톨릭 소개

가톨릭 신앙과 미사와 성사 시간및 참여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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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소개

미사와 성사
예비자입교식

한국천주교회사

교회 창설의 배경

세초기의 지리상의 큰 발견과 이에 따른 세계적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은 동시에 서학(西學)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그는 토착인 즉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과의 적대관계로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납치자들 중 많은 이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의 개종은 일본 예수회원들에게 조선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사진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조선전도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특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아담 샬(Adam Schall, 揚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전도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전도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하였다. 《천주 실의》(天主實義)는 이미 간단하게나마 이수광(李琇光)에 의해 소개되었고, 그와 동시대인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 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다.

이익(李瀷) 역시 《천주실의 발문(跋文)》에서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지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창설과 조선교구의 설정

교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벽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서 선교사를 방문하고,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과연 이승흔은 북경에 이르러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본명으로 영세 하였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하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 과 친지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해 9월(음)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또한 정약전과 정약용 (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 (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권일 신은 개종과 더불어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됨으로써 이승훈, 이벽과 함께 신생교회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그는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시 켰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이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되었고 이어 그는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가성직제도는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선교사들은 성직자의 영입을 권고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밀사를 파견하여 구베아(de Giuvea, 揚士選) 북경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년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00년에는 1만명으로 늘어났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보장을 애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진1831년 조선교구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을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우들 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파리 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받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북경교구로부터의 조선교구의 독립이 명실공히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회는 교황청 및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이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박해

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 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은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다.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 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 흔들어 놓았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또 이 박해에서는 이미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 같은 인물들에게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초기교회에서 주요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황사 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피신처에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상서]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盛行)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선교사들이 순교한 결과 이제부터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 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녀교우 9명이 그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중 현석문(玄錫文)은 다른 교우들과 같이 1839 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를 남겼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 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 에 시작된 소위 병인박해는 그 후 근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두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 박해에서 재한선교사 12명중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南種三), 홍봉주(洪鳳周) 등 8,000여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재입국이 시작되었으나 곧 다시 체포되지만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드게트 (Deguette, 崔東鎭) 신부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선교사에 대한 박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린 때문이다. 이밖에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양이주의(鎖國攘夷主義) 등도 박해의 원인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로 들어가서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는 철종연대(1850∼1864년)에 비교적 편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많은 교리서적을 인쇄 보급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수용 당시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한문에 의한 지배층의 지식 독점화로부터 민중에 대한 지식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박해는 신앙의 눈에서 볼 때 틀림없는 교회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회가 박해를 받음으로써 도리어 발전한다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사

교회 창설의 배경

근세초기의 지리상의 큰 발견과 이에 따른 세계적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은 동시에 서학(西學)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그는 토착인 즉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과의 적대관계로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납치자들 중 많은 이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의 개종은 일본 예수회원들에게 조선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교회 창설의 배경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사진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조선전도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특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아담 샬(Adam Schall, 揚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전도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전도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하였다. 《천주 실의》(天主實義)는 이미 간단하게나마 이수광(李琇光)에 의해 소개되었고, 그와 동시대인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 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다.


이익(李瀷) 역시 《천주실의 발문(跋文)》에서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지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 창설과 조선교구의 설정

주교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벽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서 선교사를 방문하고,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과연 이승흔은 북경에 이르러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본명으로 영세 하였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하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 과 친지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해 9월(음)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또한 정약전과 정약용 (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 (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권일 신은 개종과 더불어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됨으로써 이승훈, 이벽과 함께 신생교회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그는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시 켰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이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되었고 이어 그는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가성직제도는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선교사들은 성직자의 영입을 권고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밀사를 파견하여 구베아(de Giuvea, 揚士選) 북경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년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00년에는 1만명으로 늘어났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103위 성인화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보장을 애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진1831년 조선교구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을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우들 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파리 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받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북경교구로부터의 조선교구의 독립이 명실공히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회는 교황청 및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이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박해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 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은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다.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 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 흔들어 놓았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또 이 박해에서는 이미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 같은 인물들에게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초기교회에서 주요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황사 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피신처에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상서]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盛行)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선교사들이 순교한 결과 이제부터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 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녀교우 9명이 그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중 현석문(玄錫文)은 다른 교우들과 같이 1839 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를 남겼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 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 에 시작된 소위 병인박해는 그 후 근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두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 박해에서 재한선교사 12명중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南種三), 홍봉주(洪鳳周) 등 8,000여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재입국이 시작되었으나 곧 다시 체포되지만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드게트 (Deguette, 崔東鎭) 신부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선교사에 대한 박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린 때문이다. 이밖에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양이주의(鎖國攘夷主義) 등도 박해의 원인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로 들어가서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는 철종연대(1850∼1864년)에 비교적 편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많은 교리서적을 인쇄 보급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수용 당시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한문에 의한 지배층의 지식 독점화로부터 민중에 대한 지식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박해는 신앙의 눈에서 볼 때 틀림없는 교회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회가 박해를 받음으로써 도리어 발전한다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